자발적 스타벅스

그렇게 세상을 더 일목요연하게 미장할 뿐인 ‘비판’이, 정말로 대청소를 이룰 수 있기는 한가?

<자발적 복종>을 지난 목요일에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이 화요일 오전에 압구정 방면 351번 버스에 올라 잠시 펼쳤다. 목수정님의 “역자 서문” 부분을 읽다가 덮어 버렸다. 중간쯤에서 사람 좀 없어 보이는 스타벅스가 눈에 띄면 바로 내리려고. 그렇게 랜덤한 곳에서 내려서, 선물 받은 카카오선물하기 쿠폰으로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빈 플라스틱 컵에 저지방 우유를 (멋대로) 채워 마시면서 인터뷰 녹취를 풀다가, 점심 시간대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갈 즈음 문득 다시 책 표지로 눈길을 돌려 본다.

빠르동 라 보에시, 죄송합니다 목수정님. 다시 이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의 승리’니 굴종하는 대중이니, “존엄 그까짓 것 개나 줘 버린다”느니 땅콩 회항 사건이니 분기탱천하면서도, 그 모든 사태에 반격하는 논의가 고작해야 “자유에 대한 두려움의 주술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라면, 그 고귀하고 우매한 대중이 “자발적 복종”에서 벗어나는 일이란 그저 요원하고도 요원할 뿐이다.

대중은 정말로 스타벅스를 위시한 자본과 “유신의 딸” 등등에게 정말로 굴종해 있는 것인가? 그것도 어처구니없으며 비인간적이게도 자발적으로? 적어도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 내가 이 순간 스타벅스 한구석에 앉아 있는 건 내가 존엄을 우리 집 강아지에게 줘 버린 노예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수많은 스타벅스 지점 중, 아니 무수히 많은 “노트북을 5시간 이상 놓아 두고 혼자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의 옵션 중 가장 내게 적절해 보이는 곳을 고르는, 제 아무리 자본주의적인 옵션 위주로 사고하고 행동할지언정, 나름의 주체적 개인이다. 하지만 목수정 님은, 적어도 이 동네를 버스 타고 지나가다가 문득 창문 너머로 나를 보면, “아 저번에 <자발적 복종> 역자 서문 쓸 때 생각했던 대중들이다, 쯧쯧” 할지도 모른다!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생각을 펼치는 ‘셔먼’ 내지 ‘비숍’들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오만의 죄 중 하나가 바로 이 괴리에서 나온다. 대중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모순과 죄악의 늪에서 그래도 최소한의 존엄과 자기만의 호흡을 지키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태이다. (평생 공부만 하다가 노가다로 돈을 벌어 본 신학생들에게 물어 보라. 대중은 어쩌면 전반적으로 당신보다 더 고매할 수 있다.) 늪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옷을 적시지 말고 품격을 지키라고 충고하는 것이, 최소 비용으로 최대 시간의 자기 공간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편이 카페뿐이어서 카페에 가는 20대들더러 “카페는 왜 가냐? 브랜드 카페가 만든 자본주의적 허영에 너를 투사하고 싶은 거냐?”라고 꾸짖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하면, 크게 문제가 있을까?

더 중요한 문제로, 과연 <자발적 복종>이라는 글을 읽는 것이, <자발적 복종>을 판매하기 가장 좋은 형태와 조건으로 포장해서 팔아치우는 지금 시대에, 자발적 복종을 깨는 방편이 되는가?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입만 열면 떠드는 지론이긴 한데, 비판이 ‘비판’이라는 상표를 붙여 유통되고 소비되는 지금, 그 무슨 비판이 과연 비판의 기능을 하긴 하는가? 당신은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순진하게 분개하는 편인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강씨 이씨 인문학자들이 입만 열면 “잡스의 덫에서 탈출하라” 운운하는 강연을 펼치고, 그 강연이 연일 만석을 이루며 (상당수 요청의 user-agent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나 맥으로 잡히는) 수많은 공유와 라이크와 리트윗과 코멘트를 받는데, 정작 그 강연을 듣고 자기 휴대전화를 FairPhone으로 바꾼 사람은 과연 이 나라에 몇 명인가? FairPhone이 뭐냐고? 당신들이 그 좋아하는 ‘거대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서 ‘공정 무역’을 거쳐 생산되는 모듈 조립형 스마트폰이다. 처음 들어 본다고? 하! 역시 앞에 말한 잡스의 덫 따위는 안 물어볼 줄 알았어. 하나 더 물어보자, 그 강씨, 그 이씨는 한 번이라도 FairPhone이나 그에 준하는 실존하는 아이디어를 언급한 적이 있는가? 없다. 그런 거 억지로 힘들게 찾아서 제시해 주지 않아도, “잡스의 덫”이라는 명사구만 던져 놓으면 수용의 주체인 대중과 비판의 주체인 식자들이 공동으로 소비하고 (여러 의미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체로, 결정적으로 비판의 대상을 와해하여 폭파해체하는 비판이,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각자의 사정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2015년의 인류는 굉장히 빠른 성장과 무식하게 좋은 생활 여건 그리고 딱히 크게 변하지 않아도 좋을 문명을 구축해 놨기 때문이다. 비유로 다시 말하자면, 가끔 화면 보호기를 켰다 끄고 가끔 디스크 조각 모음을 예약 작업으로 하면 했지, 전원 플러그를 뽑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체제가 불쾌할지언정, 작동 자체를 그만둘 생각은 아무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의 책 <혁명을 팝니다>에 여러 방향의 이유 설명이 있지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선에서 한 가지 논점만 가져와 보자면, 일견 자본주의가 납득 가능한 수준의 평등을 실현하고 보급한 체제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라 보에시가 글을 쓰던 시기에 일반 대중은 자본의 시장 분배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항상 포도와 곡물은 자기들의 밭에서 나서, 지주들과 임금님과 성직자들에게 바쳐졌던 것이었다. 지금의 일반 대중은 생산하면서 소비하고, 소비하면서 생산하는 고도화된 시장 경제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좋든 싫든 동의하는 바, 자유 시장 경제는, 양극화를 낳을 수는 있어도, 모두를 다함께 한꺼번에 가난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내가 그렇다. 100년 전 아니 50년 전에 내가 압구정 근처 가배다방으로 가서 서너 푼 내고 온종일 앉아 지필묵을 쥐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카카오선물하기 쿠폰? 언감생심이다. 양극화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제가 모두 증거하는 바, 자유 시장 경제 체제가 일반 대중에게 전반적인 생활 수준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좀 인정하고 가자는 것이다.

예컨대, 좋다, 당신이 스타벅스를 박살내고 싶다고 하자.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폭탄과 멋진 격문일까?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스타벅스를 다녀 보니, 사실은, 그런 당위와 충격이 없어도 카페 다니며 잘 살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제공할 그것보다 더 좋고 옳은 구체적인 삶의 요소, 이를테면 스타벅스 티라미수 이상의 대용품이 필요하다. 당신이 스타벅스가 왜 부셔버려야 할 존재인지에 매몰돼 있는 한, 사람들이 스타벅스에 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티라미수라는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때 스타벅스는 백날 폭파되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잊을 만하면 주변에서 “돈을 죄악시하는 것 같다”라는 평을 듣는 천생 촌놈이다(아닌 게 아니라 집안도 말만 김해김씨지 족보도 없는 상놈 집안이었을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가 <자발적 복종>을 읽으며 괜히 가슴 벅차고 눈물도 좀 날 것 같은 사람들(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위하며 노리고 있는 식자들)에게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것은, 제발 부탁이니 어떤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본디 그런 것으로 인정한 다음에 다음 논의를 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일이 될 뿐더러, 내가 좀 강경하게 주장하는 바, 사실은 그게 실제에 대한 덜 규범적이고 더 냉정하게 옳은 접근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름을 던져 보자. 이명박. 노무현. 박근혜. 안철수. 전두환. 문재인. 변희재. 김미화. 내가 지금 좌우를 떠나자는 논의를 하고 있다고 읽는다면, 당신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이 이름들을 보며 “음 뭔가 이쪽 것 하나 저쪽 것 하나씩 교차 배치했군”이라고 읽고 그만두는 한, 당신은 저 이름들 중 누구에 대해서도 온전히 독립적으로 가장 온당한 논점을 도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각각의 이름의 소유자들에 대해서, ‘음 저 자는 이러이러한 일들을 했는데 그것은 왜 그랬을까’라는 백지적(白紙的) 사고를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런 경우에는 희망이 있다 할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바보라도 다 생각을 하고 산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은, 아무리 어처구니없더라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생각, 그 이유를 바보 같다느니 어처구니없다느니 등등 비논리적으로 선행하는 판단으로 뭉갠 뒤 ‘그러니까 누가 대통령이 돼야 해’, ‘그러니까 이런 법이 생겨야 해’ 운운하는 것이란, 트위터에서 한국정치를 논하는 것처럼이나 허무하지 않은가? 그리고, 자본과 권력과 대중과 그 모든 상황에 대한 크고 아름답고 거시적이기만 한 비판들도, 사실은 그렇게 그 숱한 (바보 같은) ‘생각’과 (어처구니없는) ‘이유’의 엄존을 뺑끼 발라 덮어 버리는 일일 뿐이기만은 하지 않은가? 그렇게 세상을 더 일목요연하게 미장할 뿐인 ‘비판’이, 정말로 세상의 추잡함을 폭로하고 그 폭로를 보급해서 대청소를 이룰 수 있기는 한가? 난 회의적이다.

“아무리 멍청한 생각이라도 사람은 다 생각을 하고 산다”, 이것은 내 지론이다. 적어도 나는 이 지론 덕분에 <한겨레21>이 가끔 벌이는 무책임한 선동과 <월간조선>이 주구장창 떠드는 비인간적인 도그마 모두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이런 관점에서 생각을 시작하게 된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어떤 맥락의 공간에서 어떤 지위의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 편견과 선입견을 오만하게 투영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실천하고 있을 정도면, 이는 반성적 사고의 기초 중 기초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평생의 기조로 삼을 만한 글월과 사상을 지을 줄 안다는 사람들이, 그들이 목도하는 “멍청한 생각”과 “어처구니없는 일”―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대중의 자발적 복종일 것임에도―을 보면서, 그 멍청함과 그 어처구니없음만을 줄곧 강조하고 있는 걸 본다. 그 책을 읽어 주는 독자가 굳이 351번 버스를 타고 서울 외곽에서 ‘강남’으로 진입하고 있는데, 그 행동 하나하나조차도, 그런 방식으로 실컷 오독되고 매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시 책을 가방에 넣어 놓고,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간다. 그렇게 나는 자발적으로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다. 당신은 목수정 님도 아니고 라 보에시도 아니므로, 나를 생각 없는 된장남이라고 마음껏 욕해도 좋다. 다만, 그 욕은 나의 실제 사태와 생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내 삶의 어디에도 꽂히지 않고, 그냥 허공을 향해 쏜 총알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정확히 보고 욕이든 뭐든 하는 일을 전혀 못/안 하고 있으므로, 여전히 다시 그 16세기로부터 지금까지 요따시만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유감이다. 이렇게 위대한 책은, 스타벅스 같은 “자본의 시궁창”을 벗어나서, 집에서 조용히 읽어야겠다.

최초 발행: 2015년 7월 21일, yuptogun.tumblr.com
재발행의 변: 이 시절의 나는 첫 두세 문단이 묘사하는 하루를 거의 매일 반복하고 있었다. 콘텐츠로 돈을 벌겠다며 신촌, 강남, 성동구 어딘가를 노트북 하나 들고 데굴데굴 굴러다녔던 세상 제일 한가롭게 바쁜 삶이었다. 사실 이 글은 이제 와서는 글 내용 자체보다는 이렇게 살며 이런 걸 쓰던 시기도 있었다는 걸 상기시켜 준다는 점이 더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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