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범죄
지금은 sin이 crime으로 둔갑하는데, 갈수록 더 자주 그렇고, 날마다 더 노골적으로 그런 세상이다.
1. 죄라는 말을 한자로 罪라고 쓴다. 사람이 안될[非] 짓을 해서 포박[罒]에 잡힌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옛날에 辠라고 썼던 것을 사연이 있어 바꿔 쓴 것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중국 역사상의 황제[皇]가 된 진시황이, 그 글자 모양이 흡사 자신만의 1인칭 재귀대명사가 된 皇과 모양이 너무 흡사하다 하여, 금지시키고, 대신 쓰게 한 글자가 바로 罪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크나큰 불행을 초래했던, 그야말로 죄받을 짓을 하고 산 인간 진시황 덕에, 우리는 스스로[自] 쓴맛[辛]을 보러 들어간다는 의미의 글자 辠를 거의 쓰지 않게 됐다.
2. 스스로 쓴맛을 보러 들어간다? 사실 이 파자는 내가 한 것인데, 그 글자가 가진 뜻이 너무도 명백하고 쉽고도 심오한 덕이다. 죄를 지어 본 사람은 안다. 자기가 저지른 것이 죄임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파자에 관련된 것뿐이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아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 내가 이렇게 후회하고 있으리라는 걸 그때의 나는 무슨 넋빠진 생각에 짐작을 못 했지?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나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추잡하고 음흉하고 사악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마음은 나쁜 짓을 해서 오라를 받기만 하면 바로 갖게 되는 마음이 아니다. 그 죄의식(辠意識)은, 오직, 자기가 열심히 핥던 그 맛이 독극물의 쓴맛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의식이다.
3. 진시황 이래로, 드디어 오늘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류에게 죄란 한 번도 辠였던 적이 없고 그저 정도의 차이만 더욱 맹렬히 편차를 보이는 罪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무슨 구체적인 예시를 대려 해도 차마 잔혹하여 뭘 댈 수가 없다. 유치원 선생이 애를 바늘로 찔렀다더라, 아파트 주민이 아파트 경비를 드잡이했다더라, 연예인들이 카메라 뒤에서 서로 반말을 주고받으며 싸웠다더라, 거진 300명 가까이가 영해상에서 수장되는 꼴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더라, 무슨 SNS에서 바른말 잘 하던 아무개가 헛소리를 굽히지 않는다더라… 누군가가 안될 짓을 저지르고, 누군가가 그걸 목격하고, 어떤 사람들이 그 자를 포박해 데려오고, 수많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포박된 자를 네거리 광장에 무릎 꿇려 놓고 돌을 던진다. 오직 이 육체적이고 제도적인 순환만이 있을 뿐, 아무도 뉘우치지 않으며, 아무도 그 죄에 깔린 쓴맛의 맹독성에 관심이 없다.
4. '우리 안의 XX' 어쩌구를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밑에서 또 굳이 논하겠지만 일단 결론부터 논하자면, 본전도 못 찾을 소리 씨부리지 말라고 해라.)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복잡하면 얼마나 복잡하다고, 도대체 지금 오늘 이 세상은 뭔 놈의 죄가 이렇게 많고 죄인이 이렇게도 많은가? 부연하자면, 그렇게도 많은 놈과 많은 일을 죄인과 범죄로 판결해 놨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갈수록 지옥도 일변인가? 왜긴 왜겠어, "범죄"가 너무 많은 바람에 죄가 죄로 발견되지 않아서지.
5. 범죄는 많을지 모르되 죄는 하나뿐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옥편의 뜻풀이가 마침 편을 들어주기에 한번 인용해 본다. 죄란: ④하나님의 계명(誡命)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命令)을 감수(甘受)하지 않는 인간(人間)의 행위(行爲). 조금 겸연쩍을 정도로 정통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명쾌하게 요약한 이 풀이는 그 ‘인간의 행위’의 명목(名目)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그 내용이 뭔지, 형사법이 표현하는 죄명이 뭔지가 하나님에게는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문제는 오직 거역과 감수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지키면 장차 선행의 보응이,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형벌의 쓴맛이 너 자신에게 돌아올 줄을 알아라. 민수기 32장 23절에는 "죄가 당신들을 기어코 찾아낸다"라는 표현이 있다. 죄에 쫓겨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죄의 속성에 대한 절묘한 서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죄인'이니 '범죄'니 하는 것에 응당 따라붙어야 할 것은 오직 이것뿐이지, 지금의 이른바 '조리돌림'이, '구알티'가, '신상털이' 같은 것이 무슨 죄를 주기나 준다는 말인지, 나는 도대체 알지 못하겠다.
6. 영어에는 sin과 crime의 두 단어가 있다. 우리말에서 전자는 흔히 '죄'로 번역되고 후자는 주로 '범죄'로 번역된다. 사전으로만 찾아 보면 둘 다 의미가 거의 비슷하므로 헷갈리기 쉬울까 봐 편집자들이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nota bene를 달아놓기를, sin은 종교적/도덕적인 죄를, crime은 형사법상의 위법 행위를 주로 의미한단다. 이 구별, 이 사회과학적으로 실증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지적으로 상당히 진보한 개념적 구분이, 오늘의 결국에 와서는 좀 우습고 처량하다는 이야기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요컨대 지금은 sin이 crime으로 둔갑하는데, 아주, 아주, 아주 많은 경우에 그렇고, 갈수록 더 자주 그렇고, 날이면 날마다 더 노골적으로 그런 세상이다 이 말이다. 사람은 오로지 그 지은 죄의 결과에 따라 처벌받고 배상 책임을 진다! 얼마나 알기 쉬운가! 말단 노동자 엎드려뻗쳐를 시키든 파업한 새끼들 혼구녕을 내 주든 원인 규명하고 선체 인양하라는 유가족의 요구에 대해서든 적당히 일금을 치러 주면 그만이다! 크으 앞으로 한 세기쯤 지나면 자기가 비고의적으로 저지른 죄의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한 보석금 보험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와 상상해 보니 좋나좋군? 그 날이 오면 교도소에 출입하는 종교인들은 다들 그 보험만 특별히 판매하는 라이센스를 얻어 다닐 성싶다!
7.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 안의 XX'론 일체가 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그래서 본전도 못 뽑을 이야기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보자. XX의 자리에 "일베"라느니 "파시즘"이라느니 하는 것을 넣어 쓰는 모양이니, 아마도 그 XX에는 죄목 내지 그 죄목으로 불리는 신분의 호칭이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뭐? 우리 모두에게 그 죄목의 혐의가 있으니 대마불사론을 적용하여 그냥 crime의 범주에서 빼자는 건가? 그게 "빼박캔트"의 sin인데? 뉘우침이 필요하고 참회가 요구되고 그 쓴맛을 스스로 다 맛보아 먹어삼키고 앓고 낫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절대 외부적일 수 없고 절대 물리적일 수 없는 죗값 치르기가 반드시 요구되는 허물이 그 XX인데, 그걸 그저 사회 구성원 일반이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는 사안이란 이유만으로 마냥 용인하거나 이해해 주자 뭐 그런 건가? 야훼 하나님은 우리더러 죄를 여하간에 이해라도 해 보라고 하신 적이 있나? 부정 타니까 멀리 떨어져서 짱돌을 던져 으깨 죽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8. 사실 현대의 가장 큰 사회악 중 하나는 회개 개념을 완전히 고사시켰다는 데 있다. 죄를 뉘우치고 거듭나는 방편들 중 반드시 필요한 내면적 방편으로서의 회개를 아주 세속과 동떨어진 신선 놀음으로 만들어놓은 감이 있다. 회개? 너 지금 나 보고 회개라고 했냐?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고 나왔더니 이젠 뭐? 날더러 회개를 하라고? 왜, 그 다음에는 뭐 간디 비슷한 게 되어서 아프리카 애들한테 국수라도 나눠주라고 하지? 성인군자는 너나 많이 하세요, 나는 악착같이 벌어먹어도 살아남기 어려운 한 세상 내딴에 열심히 살다 이 모양 이 꼴로 갈 거니까! 내 인생에 뭐 보태줄 거 아니면 저리 꺼져!
9. crime은 sin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罪는 포박에 묶이는 것이기 이전에 辠, 스스로 그 죗값의 쓴맛을 감당하는 것이다. Criminal이 그렇게 많고 악성 범죄는 끊이지 않지만, 갈수록 자기를 'sinner'로 신앙 고백하는 자는 찾기 어렵고, 정말로 그 쓴맛을 뉘우치는 사람 역시 점점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토 트위터를 자중하고 있는 최규석 작가님 정도나 보일 뿐이다.) 범죄는 많은데 죄가 없고, 속죄는 더 없고, '죄'라는 단어와 개념의 사용 빈도는 더더욱 하락일로를 달린다. 다들 매일 똥 싸고 뒤를 안 닦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라면 밥 먹듯이 저지르는 후회와 탄식의 원흉으로서의 범죄를 처치하고 청산할 생각을 어찌 이리도 안 하고 살 수 있는지. 그러면서 어쩜 또 그렇게 옆 사람 인생 근처에서 구린내 난다고 면박은 그리도 잘들 주고받는지. 근데 왜 세상이 이렇게 미쳐돌아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무식한 소리들은 또 어쩜 그리들 쉽게 하는지.
0.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모르겠다가 네이버 사전 한 번 보고 정말 간만에 삘받아서 마구 써내려간 글이다. 몇 번 윤독하고 수정할 여지가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현의 세밀화에 관한 것일 뿐, 줄거리 자체는 거의 안 변할 것이다.
최초 발행: 2015년 4월 6일, yuptogun.tistory.com
재발행의 변: 2015년에 처음 "마구 써내려간" 다음 한 글자도 더 고치지 않은 글이다. 이젠 말을 좀 바꿔야 될까 싶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더 악한 sin이 더 뻔뻔한 crime으로 둔갑해 왔다. 물론 그게 잘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한자 풀이 부분이 미묘하게 틀린 게 있어, 네이버 한자사전을 첨부한다.
"본래 ‘허물’이나 ‘죄’라는 뜻은 辠(허물 죄)자가 쓰였었다. 辠자는 自(스스로 자)자와 辛(매울 신)자가 결합한 것으로 고대에는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의 코를 잘라 처벌한다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소전에서의 辠자가 ‘황제’를 뜻하는 皇(임금 황)자와 비슷하여 진시황 때는 이를 피해 새로이 만든 글자가 바로 罪자이다. 罪자는 ‘아니다’나 ‘나쁘다’라는 뜻을 가진 非자에 网자를 결합한 것으로 ‘잘못(非)을 저지른 사람을 잡는다(网)’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