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누가 내게 콘텐츠를 선보이게 해 다오. 그러면 이 헬조선이라도 뒤집어 보이겠다.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콘텐츠는 나에게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다.

글을 쓸 줄 알고, 그림을 조금 그릴 줄 안다. 파워포인트를 할 줄 알고, 워드를 할 줄 알고, 아래한글을 할 줄 알고,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할 줄 알고, 소니 베가스를 할 줄 안다. 기획을 할 줄 알고, 제작을 할 줄 안다. 섭외를 할 줄 알고, 예산을 짤 줄 안다. 가장 실현 가능한 전략이 뭔지 냉정하게 파악할 줄 알고, 실행할 줄 알고, 따온 소스들을 활용해서 콘텐츠를 만들어낼 줄 안다. PD 역할, 조연출 역할, 작가 역할, 배우 역할, 편집감독, 음향감독, 총책임, 다 할 줄 안다.
경험해 보아서 안다. 콘텐츠로 사람을 울려 본 경험, 웃겨 본 경험, 정말로 화나게 해 본 경험, 누구도 관심 갖지 않던 세계에 관심을 갖게 한 경험, 모두가 관심 있는 영역에서 새로운 포인트를 잡아내 강조해본 경험이 있다. 정말이다. 나에게 전권(全權)과 사람과 장비와 시간과 예산을 다오. 그러면 그 빌어먹을 4차 산업혁명 한류 주도 콘텐츠라는 것을 만들어 보이겠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에서 이름을 떨쳤던 과학자가 비슷한 말을 했다는 모양이다. 나에게 지렛대 하나만 다오, 그것이 지구의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튼튼하기만 하다면 이 세상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 그가 이 지구를 어떻게 결딴내 볼 야심이 있었던 것은 명백히 아니었다. 다만 좀 알아 달라는 것이었다. 지렛대라는 것이 있다고. 이걸 좀 써서 조금 덜 무식하게 좀 덜 힘들게 살자고. 내가 지렛대가 뭔지 안다고. 내게 기회를 주어 그것의 위대함을 좀 보여줄 수 있게 해 달라고.
아르키메데스의 업적은 오늘날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긴요하고 기초적인 콘텐츠로 남아 있다. 지렛대의 원리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곳에 쓰이고 있고, 구와 원기둥의 부피 계산, 무한히 큰 수를 표현하는 방법 등 살아 생전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발견과 발상을 남기고 죽었다. 심지어 죽는 그날까지도 그는 기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는 모양이다. 임무를 위해 그를 찾아온 로마 제국의 병정이 관심을 받지 못한 것에 격분하여 그를 어처구니없이 찔러 죽이기 직전까지.

콘텐츠란 것이 실로 이러하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원기둥의 부피 계산법, 당신이 절대로 몰랐을 우리나라 관광명소 Top 5, 나선형 양수기, 청년 주거 빈곤에 대한 자기분석, 지구를 들어올리는 지렛대에 관한 고찰 등에 관심이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정말로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면, 정말로 그런 것이 제 값을 받고 제 몫을 해내는 사회였다면, 과연 아르키메데스 같은 머리 좋은 사람이 지구라도 들어보일 테니 제발 지렛대라는 것을 좀 주목해 달라는 허풍을 떨어야 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사람들은 정말로 콘텐츠에 관심이 있을까? 제작된 콘텐츠가 제값에 팔리고,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퍼진 콘텐츠가 긴요하게 제 역할을 하는 문화적 기초가 있는 세상은, 과연 몇십 세기 뒤에나 올 것인가? 어쩌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저 무슨 끝없는 재미를 만들겠다는 케이블 오락채널이 격분하여 휘두른 금권에 어처구니없이 생을 마감한 어느 PD처럼 스러지는 결말밖에 주어지지 않은 것일까?

나에게 "콘텐츠"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다. 누가 내게 콘텐츠를 선보이게 해 다오. 그러면 이 헬조선이라도 뒤집어 보이겠다.

최초 발행: 2017년 5월 2일, facebook.com
재발행의 변: 한국콘텐츠진흥원 페이스북이 주최한 "콘텐츠는 나에게 ~이다" 백일장에 제출했고 당연히 낙방했다. 그건 아쉽지 않고,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아르키메데스의 "내 원기둥을 밟지 말라" 일화와 이한빛 PD의 희생을 좀더 촉감 있게 엮을 수도 있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너무 피상적으로만 사용하고 말았다는 그 부분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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