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에 죄송한데 성별 떠나서 얘기하지 맙시다."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초면에 죄송한데 성별 떠나서 얘기하지 맙시다."
트위터 보다가 뭔 되도 않는 맥락에서 무슨 대단한 훈수나 되는 양 '성별을 떠나서 그건 누구나 다~' 하는 맨스플레인이 보이기에 그냥 그 한마디를 답글했고 생각보다 많이 '마음에 들어요' 됐던 일이 있다. 꽤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사실 저 답글을 적고 나서 좀더 생각해보게 됐다. 그러게, 이제 ~를 떠나서 얘기하자는 말은 좀 덜 써도 되지 않을까?
A를 떠나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보통은 A가 전혀 삶에 제약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한편, 예를 들어서, 자기의 인종 구분이 생활의 면면에서 수시로 의식할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인종을 떠나서 얘기하거나 뭘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이 #BlackLivesMatter 라고 흑인을 명시하며 봉기했을 때조차 굳이 "All Lives Matter"를 들고 나왔던 백인들을, 눈치 없는 망나니 기득권들로 보아도 좋은 이치가 그런 데에 있다. 성별은 또 어떤가? 2020년대 초입인 지금 성별만큼이나 도드라지게 차별, 구분, 배제에 작용하는 요소가 또 있나 싶은데 성별을 떠나서 얘기하자고? 웬만하면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 우리는 그걸 다 떠나서 얘기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이 살아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도 자유인도 남녀도 없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 같이 된다지. 하지만 그 천국은 아직 재림하지 않은 상태이고, 지금의 우리는 이 땅에서 그날이 와도 좋을 정도로 사람들 버릇을, 내 버릇을 잘 길들여놔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던 이들을 그보다는 더 존중하는 시절이 한창 지나야만, 비로소 모두가 충분히 존중받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써놓고 보니 당연한 소린데 어째서 "그런거 다떠나서 봐도" 운운 소리에 기가 죽고 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나라도 그런 말은 가급적 안 쓸 생각이다. 뭔가를 차치하고 얘기하고 싶더라도, 차치하지 말아 보기. 지금껏 차치돼 왔던 입장과 사람들을, 가운데에 놓고 다시 보기.
최초 발행: 2020년 12월 31일, facebook.com